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다 노부나가/생애 (문단 편집) === 쇼군의 거병 === 한편 적대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새로운 영지를 갉아먹는 와중,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결국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다케다, 호조 등의 세력에 고나이쇼를 보내며 자신 또한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서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군세에 의해 친 노부나가 세력에 복속되어있던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또한 쇼군의 움직임에 빠르게 반응해나갔다. 이들은 5년에 걸쳐 적대해온 [[미요시 산닌슈]] 세력과 강화를 맺어 자신들이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 참전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히사히데 부자가 1571년 5월 6일, 요시츠구가 6월 11일에 거병하여 [[카와치]]의 하타케야마 가문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완전히 노부나가를 져버리고 쇼군의 편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이들은 7월 4일에 [[야마토]], 15일에 [[셋츠]] [[타카츠키 성]]의 [[와다 코레마사]], 8월 4일에 [[츠츠이 준케이]], 10월 15일에 [[아와]] 세력의 원조를 받으며 야마토를, 11월 14일엔 다시 카와치를 공격하는 엄청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게 된다. 더욱이 [[비젠]]의 전선에서 군사를 물리고 돌아온 [[시노하라 나가후사]] 또한 요시츠구, 히사히데와 동맹을 맺고 7월 12일 즈음엔 키나이에서의 행적이 보일정도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껏 안정시켜놓았던 서부전선이 급속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11월 8일에는 나가후사, 요시츠구, 히사히데,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타카야 성]]을 포위하고, 츠케지로(付城)를 쌓는 등의 군사활동을 보이면서 노부나가를 더욱 압박했다. 이 키나이의 미요시 연맹은 [[신부]]이자 예수회 일본포교장이었던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카브랄(フランシスコ·カブラル)이 [[인도]] 관구장(パードン·アントニオ·デ·フアドウロ)에게 보내는 1572년 9월 23일 서간에 "근처에서 아와 및 하나의 [[쿠니]]의 주인인 시노하라공이 [[아시카가 요시테루|쿠보]]님을 살해한 미요시공과, [[마츠나가 히사히데|단죠]] 공 또한 함께 군사를 이끌고 [[아시카가 요시아키|쿠보]] 측의 성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고 나타나있으니, 미요시 세력이 얼마나 격하게 노부나가의 영역을 들이치고 있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동부 전선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과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1572년 아자이 나가마사의 본성인 오다니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572년 10월 드디어 [[다케다 신겐]]이 대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력을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전력이 신겐의 전력보다 거대했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기에 노부나가는 군대를 더 모아 신겐을 막을 여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다케다 신겐은 음력 12월 22일 노부나가의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한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설을 핑계로 군을 물리기도 했다. 이윽고 1573년 2월이 되자 노부나가와 요시아키의 악화된 관계는 표면화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요시아키는 3월에 직접 거병''', 본격적으로 노부나가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1573년 5월 다케다 신겐이 사망하면서 다케다 군이 퇴각하고 이제 한시름 놓은 노부나가는 '''재빨리 이 모두를 일축하기 시작한다.''' 1573년 8월엔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요도 성]]의 [[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전사시켰고, 11월에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카와치 [[와카에 성]]의 공격을 명해 요시츠구를 자결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로써 약 5년 동안 노부나가의 뒷통수를 노리던 미요시 가문의 수뇌부는 키나이에서 대부분 축출되었다. 전황이 최악의 끝을 달리자 [[미요시 나가하루]]는, 동년 4월에 이미 자신의 동생인 [[소고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요시츠구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고 주전파인 나가후사를 축출하며[* 나가후사는 동년 5월 18일 이후 시작된 [[우에자쿠라 전투]]에서 주군 호소카와 사네유키&나가하루에 의해 토벌당하여 장남과 함께 전사했다.] 내부세력을 어느 정도 추스렀다고 생각해서 노부나가와 친선을 맺으려는 시도를 행했지만, 노부나가는 당연히 거절했다(...).[* 나가하루에게 직빵으로 보낸 서장은 확인되지 않고, 나가후사로 인해 난감한 상황을 겪었던 모리 가문에게 보낸 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가하루는 추후에도 친선의 서장을 보냈지만 노부나가가 그를 허용하는 일은 일체 없었고 [[사이카슈]]의 보고에 따르면, 계속해서 반 노부나가 세력에 남아있을 것을 표명하여 여전히 노부나가의 적으로서 [[시코쿠]]에 주둔하는 상태에 머물렀다. 동쪽에서도 1573년 9월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자이 나가마사가 나란히 붕괴되었다. 요시아키는 [[모리 테루모토]]에 의지해 [[주고쿠]]로 달아났다. 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와 요시카게, 나가마사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술잔으로 만들고, 히사마사의 아내이자 나가마사의 어머니 오노도노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가며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